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블로 네루다 (문단 편집) == 일생 == 1904년에 [[칠레]] 중부의 파랄에서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네루다는 태어난 지 2달 만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는 13살때 그의 첫 작품을 발표했다. 아들이 시인이 되는 것을 반대한 부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네루다는 필명을 썼다. [[체코]]의 작가인 얀 네루다의 성과 성경의 [[바울]]에서 영감을 얻은 파블로라는 이름을 합쳐 필명을 만든 것이다. 이 '파블로 네루다'라는 이름은 1946년부터는 아예 법적인 이름이 되었다. 그는 문학적인 재능을 발휘해서 1921년 〈축제의 노래〉를 발표해서 시단의 인정을 받았고 2년 뒤에는 그의 첫 시집 <황혼 일기>를 출판했다. 그 이후 그의 문학적 행보는 거칠 것이 없어서 <무한한 인간의 시도>, <열렬한 투척병>, <지상의 거처>를 출판한다. 그 사이 그는 버마의 양곤의 주재 명예영사로 임명되고 특히 그가 마드리드 주재 영사로 부임 할때 [[스페인 내전]]을 겪은 것이 그가 공산당에 입당하고 반 파시즘 시를 쓴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시절에 스리랑카에 머무를 때 하층민 타밀 여인을 강간하고 그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자기 자서전에 적은 것이 요즘 논란이 되고 있다. 이는 한국어 번역본에도 그대로 실려있다. 그는 귀국 이후에 상원의원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한다. [[1946년]] 대통령에 취임한 [[가브리엘 곤살레스 비델라]] 대통령이 공산당과 체결한 협약을 파기하자 파블로 네루다는 격렬하게 비판했다. 특히 1948년 1월 6일의 의회 연설은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이에 대법원은 네루다의 상원의원 면책특권을 박탈하고, 2월 5일 국가원수 모독죄로 체포영장을 발급했다. 그 후 공산당이 비합법 단체로 인정되자 그의 망명생활이 시작된다. 그는 1952년 귀국한 이후 창작에 몰두한다. 1969년도에 공산당의 지명으로 대통령 후보가 됐지만 [[살바도르 아옌데]]를 추대하고 후보에서 사퇴한다. 그 이듬해에 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 하지만 1973년도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아옌데 정권이 무너지자, 병상에서 격렬하게 항의하는 시를 쓰다가 1973년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네루다의 죽음에 관하여 그의 측근과 칠레 공산당을 비롯한 좌파 논객들은 오랫동안 피노체트 정권에 의한 독살설을 주장했는데, 2010년대에 들어 결국 칠레 내무부에서 장기적으로 내부 조사를 한 결과 2015년 11월에 스페인어권 최대 신문 중 하나인 엘 파이스 지를 통해 실제로 제3자의 개입을 통해 독살 되었을 가능성이 유력하다고 시인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